조선 중기의 학자인 장학의 시문집이다. 고려 초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 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 인동 장씨로 칠곡군 인동면(현 구미시 인의동)과 칠곡 군 석적읍(성곡․중리․반계리), 기산면 각산리, 북삼면 율리, 가산면에 집성․세거한다. 만회당 (晩悔堂) 장경우(張慶遇)의 차자이고 어머니는 광산 이씨, 부인은 성산 이씨이다. 1642(인조 20)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창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여헌 장현광 문하에 나아가 인정을 받았으며 문장에 능숙하여 장선생의 유집(遺集)을 교정(校正)했다. 저서로 『육약설(六若說)』, 『경의잠(敬義箴)』, 『대종(大鐘)』 등 문집과 『옥산지(玉山志)』서문이 있다.
이 문집은 저자의 8세손인 두현(斗鉉)이편집, 간행하였다. 문집 중 책(策)의 「문도량형책 (問度量衡策)」은 도량형에 대한 질문에 답한 책문이다. 도량형은 원근(遠近)의 차이를 바로잡 고 백성들의 믿음을 확립시키는 기준이라고 밝히고, 도량형제도가 문란한 원인은 그 기구에 있다기보다는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지적하면서, 우리나라에는 세종 때에 세워놓은 법도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은둔책(隱遯策)」은선비의 은둔에 대한 허실을 밝힌 것으로, 은둔하는 자 가운데에는 자신의 뜻과 지조를 지키 기 위한 자가있는 반면, 단지 명예를 취하기 위한 자도 있다고 지적하고, 임금이성심으로 인재를 구하지 않는다면 헛된 명예만 탐내는 은둔자만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밖에 잡저가운데 「삼산일기(三山日記)」는 그가 보은으로 유배되어 지내는동안 겪은 고초와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한 것이며, 「옥산지서(玉山誌序)」는 옥산의 지리에 관한 글로 가치가 있다. 또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에 3년상을 주장하여 윤선도를 비호한 「청복상삼년소 (請服喪三年疏)」가있다.